[시선]채식주의자에 행복한 밥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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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부터 한국어를 배우러 오는 외국인들에게 홈스테이를 제공하고 있다. 어차피 식구들 먹을 밥 하는 김에 숟가락 하나 더 놓으면 될 줄 알았는데 식사 준비가 생각보다 녹록지 않다. 문제는 제법 많은 수의 학생들이 채식주의자라는 점이다. 얼마가 되었든 돈을 받다보니 대충 아무거나 줄 수도 없고 보통 한참 잘 먹을 10대 혹은 20대 초반의 학생들이다보니 매 끼니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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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라도 칼퇴근에 실패해서 저녁을 차릴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면 정말이지 ‘큰일 났다’라는 생각부터 든다. 지하철역에서 우리집까지 대략 500m 동안 수없이 많은 음식점들이 영업을 하고 있는데, 도저히 사먹을 만한 메뉴가 없다. 그저 퇴근이 늦은 김에 한 끼 나가서 외식하고 싶다는 이 소박한 바람이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느낌이다.

휴대폰에는 이미 몇 개의 배달 앱이 깔려 있다. 혹시나 하는 바람에 검색에 검색을 계속해보지만 치킨과 곱창과 돈가스가 화면에 꽉 들어차 있다. 고기를 안 먹을 뿐 든든한 한 끼 식사를 하고 싶은데 간혹 어쩌다 찾을 수 있는 메뉴는 컵에 담긴 샐러드 정도라서 저녁이라고 제공하기에는 너무 민망한 수준이다.

고기를 먹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 되어야 할까? 처음 하숙을 시작했을 때 하필 첫 손님이 채식주의자였다. 버섯육수로 된장찌개를 끓이고 야채볶음밥과 비빔밥, 김밥으로 돌려막기를 펼쳐보았지만 매 끼니가 너무 힘들어서 거의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스스로를 플렉시테리언(상황에 따라 동물성 음식을 먹기도 하는 채식주의자)이라고 정체화하는 데다 덩어리 고기를 잘 먹지 않아 육류를 좀 적게 먹고 산다고 생각했는데 단단한 착각이었다. 그동안 아무렇지 않게 써 왔던 카레분말에도 고기가 들어 있었고, 몇 번 사먹었던 토마토스파게티 소스에도 닭고기가, 심지어 감자칩에도 소고기가 들어 있었다. 자신의 선택이니까, 채식주의자들은 다 이렇게 어렵게 살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일까.

변화의 바람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요즘은 비건협회 인정을 받은 채식 라면을 살 수 있고 이번주부턴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에서 동물성 원료를 쓰지 않은 버거를 살 수 있다. 세계 축산시장을 좌우하는 회사인 카길도 대체육 개발에 투자를 하고 있다. 이미 기업들은 조금씩 변화의 바람에 몸을 실은 셈이다. 채식을 실천하면 불필요하게 희생되는 생명도 줄일 수 있지만 온실가스의 발생량도 줄어들고 끼니를 구하기 위해 사용되는 물 사용량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그러니 기후위기가 당면한 과제로 떠오른 이때 채식인구가 늘어나는 건 환영할 만한 일이지 걱정하거나 비난할 일이 아니다.

오이를 먹지 않는 내게 세상은 크게 적대적이지 않다. 같이 밥을 먹을 때는 오이가 없는 메뉴를 시켜주고 그것도 여의치 않다면 섞거나 비비기 전 나의 몫을 먼저 덜어갈 수 있도록 배려해준다. 채식을 지향하는 이들에게도 그 정도의 환경은 우리가 만들어 줄 수 있지 않을까? 보통의 식당에서 고기나 해산물이 안 들어간 메뉴를 선택할 수 있고 또 그 선택이 충분히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라면 모두에게 좀 더 행복한 날들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