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평] 잿빛숲으로 읽는 '게임의 가치'
by 박태학 기자잘 만든 게임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사람마다 비중의 차이는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딴 데 한눈팔지 않도록 만드는 몰입감을 첫 번째로 꼽는다. 간단한 일이다. 진짜 재밌으면, 한눈팔 새가 없다.
잿빛숲(영문명: AshenForest)은 첫인상부터 확 끌리는 게임은 아니다. 색감은 건조한 데다 귀를 사로잡는 사운드도 없다. 그런데도 작년 BIC 현장에서 이 게임을 한참 동안 지켜봤다. 심플한 외형 사이로 오직 '몰입감' 하나만을 바라본 개발자의 노고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개발사 젠틀레이븐 게임즈는 22살 청년 한 명으로 구성된 1인 개발사다. 고등학교 2학년 즈음부터 시작했단다. 약 3년간 만든 셈이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스타 개발자? 아니다. 가능성이 엿보이는 포트폴리오? 하나도 없다. 좀 가볍게 말하면 '풋내기'에 가깝다. 그런데도 잿빛숲을 지켜보게 만든 비결은 무엇일까.
욕심 버렸다.
선택하고 집중했다.
정확히는, 세상에 없던 게임을 만들기보단
내가 가진 걸 게임의 순수한 '재미'로 연결하는 데 집중했다.
혼자 게임을 만들면 개발 비용 총량이 적을 수밖에 없다. 모든 분야에 정통한 슈퍼맨이라면 모를까, 처음 게임 만드는 사람 입장에선 괜히 욕심 더 냈다가 프로젝트 자체가 엎어질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이 게임을 만든 22세 청년은 본인의 역량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을 과신하지도 않았다. 그 증거가 게임이다. 잿빛숲은 근래 보기 드문, 작지만 현명한 선택들이 모인 결과물이다.
BIC 현장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눌 당시, 개발자는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로 '캐릭터 동작'을 꼽았다. 실제로도 그렇다. 톤 다운된 잿빛 색감이 칙칙하게 보이지 않는 배경에는 캐릭터와 몬스터들의 다채로운 동작이 있었다. 즐기면서 만들 수 있는 분야에 자신의 역량을 과감히 쏟아부었고, 그렇지 못한 분야에 괜히 매달리지 않았다. 대신 '잿빛숲'이라는 이름으로 나름의 당위성을 부여했다.
잿빛숲의 백미는 보스전이다. 패턴과 연출만 놓고 본다면 대형 게임사와 비교해도 좋을 만큼 훌륭한 디자인을 보여준다. 최소 3가지 이상의 공격 방식에 페이즈에 따른 변칙 기술도 사용한다. 체력회복이 관대함에도 괜히 여유 부렸다가 바로 누워버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격력 몇 방어력 몇 수준의 숫자 놀음을 넘어, '보스가 너보다 잘 싸우니 이겼다'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이런 식으로 자극하는 승부욕은 개인적으로 환영이다.
시스템이나 배경 설정을 구석구석 살펴봐도 큰 단점은 보이지 않았다. 공개된 3종의 캐릭터는 전투 방식이 뚜렷하게 구분되며, 스킬트리 시스템으로 깊이를 더했다. 로그라이트 특유의 아이템 먹는 재미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일반 모드는 게임 좀 한다는 사람 기준으로 크게 어렵지 않지만, 하드 모드와 그 이상의 모드가 고인물 플레이어들을 기다리고 있다. 얼핏 보면 크게 눈에 띄지 않는 시나리오 역시, 작은 것 하나부터 스산한 분위기를 연출하고자 노력한 티가 난다. 그래픽처럼. 사운드처럼. 잿빛숲이란 이름처럼.
1월 24일 출시된 이 작품을 '무조건 사세요'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이제 얼리엑세스 시작한 작품이고, 솔직히 볼륨이 크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제대로 된 평가를 하기 위해선 시간이 더 필요하다. 그런데도 이 작은 게임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자본주의에 매몰된 국내 게임 시장에서도 이런 '특이점'을 가진 개발자들이 태어나고 있다는 걸 알리고 싶어서다. 이들이 트렌드를 뒤엎고 새 시대를 연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천편일률적으로 흐르는 그래프의 폭을 넓히는 꼭짓점 역할을 누군가는 맡아야만 한다.
시대착오적인 게임에 세상 물정 모르는 기사일지도 모르지만, 이런 게임들이 꾸준히 나온다면 그 시장을 바라보는 국내 게이머들의 시선이 조금은 따뜻해질 수 있다고 기자는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