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육체의 변화를 넘어…‘남성성’에 대한 끈질긴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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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얼라이브
토머스 페이지 맥비 지음·김승욱 옮김
북트리거 | 240쪽 | 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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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트랜스젠더 남성 토머스 맥비
아버지에게 학대받은 경험 탓에
스스로를 남자로 못 받아들여

20년 후 강도에게서 살아남은 뒤
자신의 성정체성을 뚜렷이 인식
복수와 폭력 대신 용서 택하며
‘살아있는 남자’로의 변화를 시작

맥비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여자답게’ ‘남자답게’라는 통념
얼마나 허약한지 깨닫게 돼

“무엇이 남자를 만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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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얼라이브>는 트랜스젠더 남성 토머스 페이지 맥비(사진)의 에세이다. 여성에서 남성으로, 페이지에서 토머스로 변화한 과정을 덤덤하게 들려준다. 육체의 변화를 넘어 ‘남성성’에 대한 끈질긴 질문이기도 하다. 스스로의 삶에 들이댄 렌즈를 통해 바라본 한 남성의 통과의례로도 읽힌다. “한번 움직이기 시작한 몸은 계속 움직인다. …사실 이것은 유령 이야기다. 아니, 모험담이다. 내가 어떻게 유령 같은 삶을 그만뒀는지 들려주는 모험담이다.”

맥비의 기억으로 구성된 이야기는 어지럽다. 마주하기 쉽지 않은 고통스러운 기억들이기 때문이다. 이름 대신 ‘나’로 풀어가는 이야기는 자신의 삶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두 남성을 교차시킨다. 1990년 피츠버그의 아버지, 그리고 2010년 4월 오클랜드의 강도. 폭력이 남기고 간 폐허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아홉살인 그는 아버지 로이가 네 살 때부터 자신에게 성폭력을 가한 사실을 어머니에게 고백한다. 하지만 그는 가정을 깨서는 안된다는 무언의 압박으로 침묵당한다. 아버지의 학대는 그의 존재를 “둘로 갈라놓았다”. 끔찍한 짓을 저지른 아버지가 아무렇지 않게 자신과 함께 엔진 모형을 만드는 이중적인 모습에 그는 반문한다. “누구나 안에 두 사람이 있는 거예요?” 여자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스스로 남자라고 생각했던 그는 아버지가 저지른 일을 계기로 스스로를 남자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는 자기 모습이 스스로에게 낯설다고 느끼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은 ‘투명인간’처럼 지내는 것이었다.

20년의 세월이 지나 오클랜드의 강도는 그의 육체를 다시금 깨닫게 한다. 여자친구 파커와 길을 걷다 만난 권총 강도에게서 목숨을 구한 것은 순전히 착각 때문이었다. 겉보기에 남자 같았던 맥비가 여자의 목소리로 말하자, ‘다스베이더’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던 강도는 깜짝 놀라 그를 풀어준다. 그가 속한 세상이 균열을 일으킨다. “모든 것이 동시에 깨어났다. …모든 자아가 지금 존재하고 있었다. 아이의 모습을 한 자아,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몸, 그리고 내가 갖고 싶은 몸.” 자신이 타고난 여성의 몸은 올바른 몸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은 남성이라는 사실을 뚜렷이 인식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20년 전 보호자는 자신을 해치고, 강도는 자신을 살려준 아이러니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맥비는 과거와 현재를 빠른 속도로 오가며, “유령 사냥”에 나선다. 자신이 되고 싶고, 되어야 하는 남자를 ‘괴물’로 만들지 않기 위한 치열한 정체성의 탐구이다.

맥비는 아버지 로이를 찾으며 과거의 트라우마와 대면한다. 그에게는 생존의 문제다. 아버지의 실패를 이해해야 자신도 그 길을 반복하지 않고, 거울 속 남자아이를 ‘찬란한 남성’으로 되살려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후드 티를 입은 남자들, 더러운 청바지를 입은 남자들, 이가 빠진 남자들, 치아가 완벽한 남자들을 지나 걸었다. … 남자들이란. 우리를 규정하는 것은 우리 사이에 놓인 경계선뿐이었다. 나 자신을 찾으려면 로이를 찾아야 했다.”

맥비의 내면처럼 혼란스러웠던 이야기는 ‘무엇이 남자를 만드는가’의 답을 찾아가며 점차 또렷해진다. 그는 자신을 해친 아버지가 친부가 아니었다는, 아버지도 또 다른 성적 학대의 피해자였다는 묻혀진 사실들을 접하게 된다. 그것만으로 과거 잘못이 용서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 역시 인간임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복수와 폭력 대신 용서를 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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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비는 ‘살아있는 남자’로의 변화를 시작한다. 이미 가슴은 절제한 상태였지만, 나 자신에 대한 회의로 성전환은 망설였던 터다. 테스토스테론 주사는 그를 여자에서 남자로 “미처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바꾸어놓는다. “아가씨라는 호칭이 그렇게 빨리 청년으로 바뀔 줄은. 남자들이 목이 긴 맥주병이나 경제적인 문제에 대한 조언을 들고 기대에 차서 그렇게 편안히 나를 대할 줄은. 그들의 아내들이 내게서 고개를 돌릴 줄은” 몰랐다고. 그는 비교적 늦은 서른 살의 나이에 성전환을 시작해 2012년 서른한 살의 나이에 법적으로 남성이 되는 절차를 마무리한다.

책은 끝나도 토머스 페이지 맥비의 이야기는 현재진행형이다. 기자이자 방송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맥비는 2015년 뉴욕 매디슨스퀘어가든에서 열린 권투 시합에 출전해 유명인사가 됐다. 현재는 아내 제시카 블룸과 함께 브루클린에 살면서 남성성과 폭력성의 관계를 조명하며 젠더 문제에 대해 논평하고 있다. 맥비의 이름을 검색하면 나오는 2018년 8월 가디언 인터뷰에선 권투 글러브를 낀 채 정면을 응시하는 근육질 남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남자를 남자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여성과 남성 간의 신체적 차이를 여성성과 남성성을 가르는 근원으로 믿는 이들도 여전히 있다. 하지만 맥비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통념의 기반이 얼마나 약한지 깨닫게 된다. 젠더가 ‘여자답게 혹은 남자답게’ 사회문화적으로 내면화된 ‘만들어진 성적 차이’라는 사실만이 아니라, 호르몬 요법을 통한 변화를 보며 생물학적 성도 가변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맥비의 이야기가 한국에 출간될 즈음 한국에서도 트랜스젠더의 목소리가 울림을 줬다. 성전환 수술을 이유로 강제 전역하게 된 트랜스젠더 여성 부사관 변희수씨는 지난 22일 “저의 성별 정체성을 떠나 이 나라를 지키는 훌륭한 군인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며 “저에게 그 기회를 달라”고 했다. 30일에는 트랜스젠더 여성이 숙명여대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기사로 알려졌다. 책에선 “어디에 있든, 네가 어떤 사람이든, 넌 살아갈 권리가 있어”라고 말한다. 자신을 진정한 모습으로 재구축하려는 용기 있는 움직임들이 세상을 바꾼다.

책은 이전의 ‘트랜스젠더 회고록’과는 다르다.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이 육체와 불화하다가 성전환을 통해 완결된 정체성을 찾는 ‘인간 승리 서사’ 말이다. 책에는 의료적 성전환 과정의 선정적 묘사나 숙명적 고통에 대한 서술도 없다. 대신 트랜스젠더라는 정체성이 야기하는 사건, 그 너머 삶의 의미까지 가닿는 보기 드문 퀴어 에세이다. 책의 마지막 “더 이상 여러 자아 사이에서 고민하지 않는 토머스”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새로운 삶을 마주한다. “나는 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속도가 느려질 때까지 계속 달렸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점점 커지는 파도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물속으로 몸을 던지는 일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