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오이 감수성’이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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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 오이를 싫어하는 동료가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오이의 ‘모든 것’이 싫었다고 한다. 그와 함께 밥을 먹으며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오이 안 먹는 사람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단지 오이를 안 먹었을 뿐인데 그동안 그는 온갖 질문과 강요에 시달려야 했다. 유난 떤다며 조롱하는 사람, 왜 안 먹냐며 화내는 사람, 이 좋은 걸 꼭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며 계속 권하는 사람, 억지로 먹이려 드는 사람 등 그가 오이를 안 먹는다는 걸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기어이 그를 오이 먹는 ‘정상인’으로 만들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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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동료는 ‘비건’(동물성 식품뿐 아니라 동물성 원료로 만든 제품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다. 동물권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선택한 삶의 방식이다. 비건은 오이를 안 먹는 사람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소수자’다. 그런 이유로 무수한 난관에 부딪힌다. 한국 음식은 대부분 비건이 먹기에 부적절하거나 비건 메뉴가 없고, 식재료를 점검하며 “○○○는 빼주세요”라고 요청하는 그를 식당에서 좋아할 리도 없다. 그렇다고 그에 맞춰 비건 식당에 가면 다른 이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

그들과 함께 밥을 먹는 일은 불편하지만 유익하다. 메뉴 정하는 일부터 모든 과정이 당연하게 여기던 세계를 향한 ‘질문’이 되고, 서로를 존중하면서 다양성을 잃지 않고자 애쓰는 ‘투쟁’이 된다. 그 과정을 통해 나의 세계는 조금 넓어진다. 함께 밥을 먹으며 우리가 먹는 음식이 필요 이상으로 고기 중심으로 구성된 건 아닐까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고, 평범한 식탁이 누군가에게는 소신대로 살 수 없게 만드는 불평등한 식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또한 사는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얼마나 무수한 차별과 배제와 혐오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지도 알게 된다. 그들이 용기 있게 “저는 오이를 싫어합니다” “저는 비건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끝내 몰랐을 세계다.

세상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기 위해서는 우선 당연한 것에 균열을 내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는 많은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갈등의 불씨가 된다.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한 변희수 하사가 여군으로 복무하기를 원한다고 했을 때 누군가는 함께 복무할 여군의 ‘불편’을 걱정하며 반대했다. 물론 어느 정도 낯설고 불편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용기 때문에 우리는 낯선 질문을 할 수 있게 되고, 그 과정을 통해 차츰 다른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최근 성전환 수술을 받고, 여성으로 성별을 정정해 모 여대에 합격한 ㄱ씨는 ‘트랜스젠더’ 변호사인 박한희씨를 보고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이렇게 어떤 용기는 다른 누군가를 구원하기도 한다. 어렵게 용기 낸 이들과 공존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오이 감수성’을 가지자고 제안하고 싶다.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 비건, 성적 지향이 다른 사람을 향해 불편하다고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 짓고, 고치려 들고, 삭제하기 전에 그들의 지향을 이해하며 곁을 내주는 지성과 감수성 말이다. 어떤 존재가 불편하다면, 그의 문제이기 전에 나의 경험과 내가 구성한 세계가 협소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세계를 넓히기 위해서는 ‘오이 감수성’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