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의 책 편지]익숙한 것으로부터 떠남으로써 다른 삶을 발견하기…여행과 문학은 닮았지요
by 은유 | 작가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황가한 옮김
민음사 | 376쪽 | 1만5000원
베트남 나트랑에 갔을 때 오토바이 구경을 실컷 했습니다. 처음엔 무슨 폭동이 일어난 줄 알았어요. 여기저기서 막 튀어나오고 하도 빠르게 떼지어 달리길래요. 그런데 잘 보니까 탄 사람들 표정은 여유로웠죠. 심지어 아빠가 운전하고 엄마는 젖먹이를 안고 뒤에 타기도 하고, 오토바이 모는 엄마 품에 앉아 숙제하는 아이도 있었어요. 사람과 사람이 체온을 나누며 샌드위치처럼 딱 붙어서 가는 모습이 차츰 정겨워 보이대요.
실은 서울에선 오토바이만 봐도 심장이 오그라들었죠. 속도 경쟁을 유발하는 퀵서비스, 배달노동 같은 고립된 위험한 일의 상징으로 보여서요. 그런데 베트남에서는 오토바이가 일상의 단란한 생활 수단인 거죠. 또 신호등이 별로 없는데 용케도 사람들이 살아가요. 무질서의 질서가, 서로를 물리치지 않고 어우러지는 광경이 도시의 고유한 리듬과 생명력을 발산하더군요. 나중엔 저도 오토바이를 한번 타보고 싶어졌어요. 같은 사물이 다르게 감각되는 기회를 갖는 일, 여행의 묘미겠죠.
베트남에서 소설을 한 편 읽었습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가 쓴 <보라색 히비스커스>인데요, 이 작품도 ‘익숙한 것으로부터 떠남’에 관한 이야기예요. 나이지리아 상류층 가정의 10대 소녀 캄발라가, 밖에서는 존경받고 집에서는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로부터 독립해나가는 과정을 그린 성장 서사죠.
“아버지는 질서를 좋아했다”는 문장이 말해주듯 아버지는 집안에서 신으로 군림해요. 나머지 가족은 입도 뻥긋 못하죠. “나는 한 번도 대학에 대해, 어느 학교에 가고 무엇을 전공할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때가 되면 아버지가 결정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녀를 훈육하는 아버지의 행동은 한국 중산층 부모가 자식을 통제하고 자식의 선택에 개입하는 현실과 그대로 겹쳐요. 사랑과 학대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를 지배하는 힘에 대해 한 점 의심 없던 소녀가 어떻게 ‘의문’을 품게 될까요. 우연히 고모네 집에 머물러요. 거기서도 계획대로 공부를 하는데 그걸 보고 사촌이 묻죠. “집에서도 매일 지켜야 하는 일과표가 있어?” 캄발라는 계속 혼란을 느껴요. “고모네 가족이 하고많은 것 중에서 웃음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우리 집 식탁에서는 항상 목적이 있는 말만 했지만 사촌들은 그냥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하는 것”도 낯설거든요. 나 살던 세상과 딴판인 삶에서 느끼는 혼란은 차츰 위안이 됩니다.
캄발라 시점을 따라가다가 또래인 당신의 질문을 생각했어요. 나를 지키는 게 중요하고, 힘들면 그만두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만둘 정도로 힘든 게 뭔지 어떻게 아느냐고 제게 다가와서 물었죠. 그 질문에 당황했어요. 누구도 그런 질문을 한 적 없었는데 너무 중요한 문제더군요. 또 그걸 묻는 걸 보니 당신이 무척 힘들구나 싶었습니다. 왜 아닐까요. 당신을 만난 곳은 사교육이 심한 동네고 명문대 진학률이 높은 학교죠. 학생들의 사전 질문에도 “작가님은 슬럼프를 어떻게 극복하세요?”가 유독 많았답니다.
캄발라도 자기 고통에 무지해요. 신체적 훼손에도 저항하지 않죠. 고통의 한계를 모른다는 건 자기 보호의 경계도 없다는 뜻입니다. 우린 어떻게 고통을 고통으로 인식할까요. 수학 공식처럼 명쾌한 답은 없어 보여요. 다만 삶의 구멍을 찾아내는 문학에서 힌트를 구할 순 있겠지요. 캄발라가 사촌을 통해 자기를 돌아보듯, 캄발라를 거울 삼아 독자도 제 삶을 비춰볼 테니까요.
이렇게 자기와 거리를 두는 ‘바깥의 시선’을 갖는 일만큼 ‘내면의 감각’을 찾는 작업도 중요합니다. 고통은 보이지 않잖아요. ‘감’으로 찾아오는 내적 신호인데요. 자신에게 집중해보지 않으면 느낌이 퇴화하죠. 캄발라는 아버지 지시대로만 살아서 감각을 잃어요. “나는 2등을 했다. 실패로 더럽혀졌다”같이 아버지의 언어로 자기 상태를 해석해요.
생각과 감정은 자꾸 말하고 표현해야 섬세해지는데 그럴 기회가 없었던 거예요. 고모, 사촌, 신부와 어울리면서부터 감정이 다양해지고 존중받는 기분이 무언지도 배워가요.
캄발라의 오빠가 고모네 정원에서 꽃을 보고 말해요. “보라색 히비스커스가 있는지 몰랐어요.” 소설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으로 저는 꼽습니다. 존재가 눈뜨는 순간이죠.
태어나서 빨간색 히비스커스만 보고 살았는데 보라색 히비스커스도 있음을 아는 것! 일상의 작은 혁명 같아요. 그런 점에서 문학과 여행은 닮았지요. 다른 삶이 있음을 발견하고 상상하게 해주니까요.
참, 소설가 아디치에는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타가 되어야 합니다>라는 책으로 유명한 페미니스트이기도 해요. 그녀가 들려주는 나이지리아 소녀 이야기가 고통에 관해, 글쓰기만이 아니라 “여성학에도 관심이 있는 18세 여성 청소년”인 당신에게 영감을 주리라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