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히틀러는 미치광이일까 ‘도박꾼’에 더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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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되지 않은 전쟁, 제2차세계대전의 기원
앨런 존 퍼시벌 테일러 지음·유영수 옮김
페이퍼로드 | 560쪽 | 3만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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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이 책은 히틀러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 출간 이후 저자는 ‘나치 부역자’라는 손가락질을 당했고 옥스퍼드 대학 강단에서도 내려와야 했다. 지금까지 출간된 2차대전에 대한 수많은 저작들과의 가장 큰 차이는 히틀러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저자는 ‘사악한 히틀러’ ‘미치광이 히틀러’라는 관점에 반대한다.

저자는 히틀러를 그저 ‘권력’을 추구했던 보편적 정치가, 아울러 ‘강력한 독일제국’에 대한 열망을 지녔던 인물로 바라본다. 이 점에서 다른 국가 정치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진단한다. 그의 지독한 유대인 혐오조차도 당시 독일인들이 가졌던 일반적 정서에 가깝다는 것이다. 다만 저자는 히틀러가 유난히 큰소리치길 좋아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상대에게 으름장을 놓아 겁을 먹게 하려는 것이 히틀러의 행동방식이었다는 뜻이다. 그 점에서 히틀러는 냉정한 전략가보다는 ‘도박꾼’에 가까웠다는 평가를 내놓는다.

저자는 히틀러에게 전쟁의 모든 책임을 돌리는 것에 반대한다. 당시 독일에 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다는 점을 히틀러도 잘 알았으며, 경기 하락을 가져올 군비 지출로 국민의 인기를 잃고 싶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저자는 ‘미치광이 개인’보다 당시의 독일에 주목한다. “독일인들이 그를 권좌에 올려놓았다”면서 “히틀러는 독일 민족의 공명판(共鳴板)이었다”고 진단한다. 여기에 유화정책만 시도했던 영국과 프랑스 정치인들, 자국 내에서 권력과 이득을 취하려 했던 폴란드·체코·오스트리아 정치인들, 신생 공산주의 국가에서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싶었던 소련의 입장 등이 전쟁 원인으로 얽혀들었다고 분석한다. 저자 테일러(1906~1990)는 영국 역사학계에서 독설가로 유명했던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