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와 성찰]때로 질병보다 더 치명적인 ‘공포담론’
by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기획위원장오염자를 색출·배제하려는 욕구
그걸 부추기는 불온한 정치세력
과거 잘못서 부끄러움 못 배워
잘못된 과거 더 아프게 청산해야
초등학교 땐 영화 단체관람이 꽤 많았다. 단 하나가 기억 속에 살아 있다. 제목도 주인공도 관람시기도 기억나지 않지만, 북한이 세균전을 위해 만든 배양시설을 남한 특공대 혹은 첩보원이 파괴하는 줄거리의 영화다.
왜 그것만이 기억되었을까? 첫 번째 단서는, 영화 속 세균을 ‘콜레라균’으로 특정해서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 콜레라에 걸린 이를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것은 전염병 중 제일 무서운 병으로 기억되었다. 한데 자료를 찾아보니, 콜레라가 1969년에 전국적으로 크게 확산되었다고 한다. 요즘 중국 우한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고 있는 것처럼, 그때 한국도 그랬다. 최종 발표에 의하면 1400명이 감염되었고 이 중 사망자가 125명이나 되었다. 그러니 그 영화가 콜레라를 소재로 한 것이든, 그냥 세균이든 내가 콜레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1969년의 콜레라에 대한 사회적 공포증의 여파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둘째 단서, 북한이 세균전을 도모했다는 줄거리는 1969년 콜레라 사태를 연상케 한다. 처음 발병했을 때 급파된 전문가는 콜레라를 가정한 비상방역조치가 필요하다고 제안했지만, 보건당국은 식중독에 지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후에 그것은 콜레라 발병이 국제적으로 알려지면 막대한 경제적 손실이 예상되어 은폐한 것임이 밝혀졌다.
질병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당국은 공식사과했다. 하지만 괴담이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여론은 악화되었다. 그때 일부 과학자들의 입을 통해 콜레라균의 외부 유입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북한이 세균을, 일본을 거쳐 남한으로 유입시켰다는 정부의 의혹제기가 있었다. 얼마 후 세계보건기구(WHO) 전문가들은 외부유입설을 입증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그것은 가짜뉴스였다.
아무튼 그래서 그 영화를 관람한 해는 1969년 이후였겠다. 실제로 나는 그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내가 한글을 터득한 것이 2학년 때였으니 필경 3학년 이후, 그러니까 영화관람 시기는 1971년 이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그렇다면, WHO의 ‘입증불가’ 발표에도 불구하고, 당국은 북한의 세균전 괴담을 통해 국민을 규율하여 독재체제를 정당화하고 있었던 것이겠다.
1972년,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을 포고하면서 정국을 긴급조치 국면으로 몰아갔다. 국민의 기본권조차 보장하지 않는 강권통치체제는 그렇게 시작했다.
이때 정부는 유신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국민을 규율하는 다양한 장치들을 활용했다. 초등학교 소년에게는 학교에서 선생님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말들이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을 것이다. 그밖에 만화책이나 어린이용 라디오 드라마, 그리고 단체관람용 반공영화 등도 중요한 도구였다. 내 기억 속에 남은 그 영화도 그런 맥락에서 단체관람이 기획된 것이겠다.
치명적인 전염병만큼 사회를 공포에 휩싸이게 하는 것은 많지 않다. 대표적인 예가 유럽의 흑사병 괴담이다. 실제로 유태인, 집시, 매춘여성, 한센병환자 등이 많은 곳에서 대대적으로 학살당했다. 치명적 질병은 사회를 극단의 공포심에 빠뜨리고, 그 공포심은 재앙을 낳은 혐의자로 ‘낙인찍힌’ 대상을 향한 집단적 분노로 이어지곤 한다. 그리고 그런 희생양 메커니즘을, 자신의 욕구를 위해 도구화하는 이들이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일으킨 질병에 대한 공포로 전 세계가 휘몰아치고 있다. 한국도, 아직 발병자가 매우 적지만, 공포담론의 확산은 예사롭지 않다. 이 공포담론 속에는 순혈주의가 팽배하고 오염자를 색출하고 배제하여야 한다는 욕구가 활개치고 다닌다. 그리고 그것을 부추기는 불온한 정치세력이 있다.
과거의 잘못에서 부끄러움을 배우지 못한 탓인가. 질병에 대한 공포담론이 종종 질병보다 더 파괴적이라는 것을. 해서 잘못된 과거는 좀 더 아프게 청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되새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