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비극적 인도 현대사를 보듬는 대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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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복의 성자
아룬다티 로이 지음·민승남 옮김
문학동네|588쪽|1만6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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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복의 성자>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3의 성’ 히즈라인 주인공 안줌을 중심으로 카슈미르 지역의 오랜 종교갈등과 학살 등 인도 현대사의 아픔과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녹여냈다. 사진은 인도에서 ‘제3의 성’으로 여겨지는 히즈라의 모습이다. 위키피디아

아룬다티 로이는 1997년 데뷔작 <작은 것들의 신>으로 단번에 부커상을 수상하며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인도의 한 가족 이야기를 조각을 짜맞추듯 정교하게 직조해내는 이야기와 시적인 문장들이 세계의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그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는 독자들 바람과 달리 이후 로이의 행보는 픽션보다 현실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인도의 핵개발과 대규모 댐건설 공사를 비판한 에세이 <생존의 비용>,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지배를 비판한 <보통사람을 위한 제국 가이드> 등 정치·사회 에세이를 쓰며 정치, 인권, 환경 운동가로 목소리를 내왔다.

그런 그가 20년 만에 장편소설 <지복의 성자>로 돌아왔다. 전작 <작은 것들의 신>이 남긴 인상이 워낙 깊었기에, 긴 침묵 끝에 내놓은 소설은 출간과 동시에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맨부커상 후보에도 올랐다.

<지복의 성자>는 그가 20년 동안 문제제기해 온 사회·정치적 이슈와 인도 사회에 대한 고민, 아픔을 모두 끌어안는 작품이다. 인도 카슈미르 지역에서 수십년 동안 지속된 이슬람교와 힌두교 사이의 학살과 테러를 배경으로, 종교적 갈등, 계급적 차별, 환경파괴와 개발 등의 이슈가 용광로처럼 들끓는다. 화려한 발리우드 영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한 편의 우아한 서사시를 노래로 듣는 것 같기도 하다.

소설의 중심인물은 인도에서 ‘제3의 성’으로 인정되는 히즈라 안줌이다. 히즈라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존재로 ‘히즈라’로 정식 인정받은 계층이다. 결혼식이나 출산 시 축복을 해주는 대가로 돈을 받고, 성매매로 생계를 잇는다. 안줌은 1950년대 중반, 인도 델리에서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한몸에 지닌 ‘인터섹슈얼’로 태어난다. 우르두어에서는 생물뿐 아니라 무생물까지 “남성 아니면 여성”이었기에 안줌의 어머니는 “언어 바깥에서 사는 게 가능할까”라며 비탄에 빠진다. 안줌의 부모는 그가 남성으로 자라길 바라지만, 시장에서 여성의 옷을 입고 화려하게 치장한 채 거리를 활보하는 히즈라를 보고 안줌은 자신이 되고 싶은 존재가 바로 무엇인지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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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히즈라들이 모여 사는 공동 거주지 ‘콰브가’에 들어가고, 그곳에서 그는 외과적 수술과 호르몬 치료로 ‘여성’이 되길 택한다. 안줌은 사원에 버려진 아이를 데려와 키우고 그곳에서 자신의 삶을 찾아가지만, 구자라트를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이슬람교도를 상대로 한 힌두교도들의 학살에 휘말린다. 동행한 남자는 살해당했고, 안줌은 ‘히즈라를 죽이면 불운이 따른다’는 이유로 목숨을 건진다. 트라우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안줌은 방황하다 아버지가 묻힌 공동묘지로 거처를 옮긴다. 그는 그곳에 집을 짓고 가난하고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를 만든다. 그곳의 이름은 잔나트, ‘파라다이스’란 뜻이다. 매춘부란 이유로 장례를 치를 수 없는 여성의 시신을 받아 장례를 치른 것을 계기로, 안줌은 오갈 데 없는 시신을 받아 장례를 치러주는 장례식장 사업도 하게 된다. 죽은 자와 산 자, 출신과 계급을 묻지 않는 이곳은 모두를 위한 안식처가 된다.

이야기의 다른 한 축은 틸로, 무사, 비플랍, 나가라는 동년배 친구들이다. 1980년대 대학에서 연극을 함께하며 만난 이들의 이야기는 인도의 비극적 현대사와 맞물려 펼쳐진다. 인도 정보국의 고위 공무원 비플랍, 정보국과 거래하며 기사를 쓰는 유명 신문기자 나가,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 출신이 불분명하며 건축학도로 명석하지만 비밀스러운 매력이 있는 틸로, 그리고 이슬람 전사가 된 무사다. 무사는 아내와 딸이 군인들에게 희생되자 이슬람 무장 조직에 들어가고, 틸로는 무사와 소식을 주고받는다.

서로 다른 두 축의 이야기는 델리의 혼잡한 거리에서 하나로 합쳐진다. 광장에 버려진 갓난아이를 두고 경찰에 넘기자는 군중에 맞서 안줌은 아이를 데려가겠노라 당당히 선언하고, 실랑이가 벌어지는 사이 한 여성이 아이를 데려가는데, 그가 바로 틸로다.

소설은 인도 현대사의 비극적 사건이 배경처럼 펼쳐지며 그 속에서 고통받고 상처받는 이들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녹여낸다. 1984년 인디라 간디 총리가 암살된 후 델리에서 수천명의 시크교도가 폭도에 의해 살해당한 사건, 2002년 구자라트에서 자행된 힌두교도에 의한 이슬람교도 학살, 카슈미르 지역 분쟁의 한복판을 주인공들은 지나간다.

또한 1984년 보팔에서 발생한 유니언 카바이드 가스 누출 사고로 수천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 급격한 현대화·도시화로 밀려나는 도시 빈민들의 끔찍한 처우, 카스트에 의한 차별, 인도 여성들의 성차별 또한 핍진하게 드러난다.

“신이 왜 히즈라를 만들었는지 알아? 신은 행복할 수 없는 생물체를 만들어보기로 결심한 거야” “폭동도 우리 내부에 있지. 전쟁도 우리 내부에 있고. 인도-파키스탄 전쟁도 우리 내부에 있어”라는 히즈라의 말엔 버려진 이들을 거두는 안줌이 왜 이 소설의 중심에 있는지를 드러낸다. 존재 자체가 자신과 세상 간의 싸움인 히즈라 안줌은 스스로 “모든 사람과 아무도 아닌 사람, 모든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의 모임”이라고 말한다.

소설의 제목 ‘지복의 성자’는 페르시아 출신 성인 하즈라트 사르마드다. 그는 사랑을 찾아 인도 델리로 온 뒤 유대교를 버리고 이슬람교를 받아들였으나 힌두교인 소년과 사랑에 빠진 뒤 이슬람교 신앙 고백문 암송을 거부해 처형된다. 목이 잘린 뒤 그의 입에서는 사랑의 시가 흘러나왔다. 사르마드가 보여준 종교적 포용력과 경계 없는 사랑은 소설의 주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산산조각이 난 이야기를 어떻게 말해야 할까? 서서히 모든 사람이 되어서. 아니. 서서히 모든 것이 되어서”라는 틸로가 적은 시 구절처럼, 소설은 산산조각난 삶들을 품어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