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신종 바이러스와 삶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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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진원지인 중국 우한에 사는 지인이 있다. 중국공안 2급 경감으로 우한경찰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그는 태극권으로 다져진 건강한 몸매와 해박한 중의학 지식을 갖춘 데다 치파오를 즐겨 입는 60대의 쾌활한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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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무섭게 전파된다는 뉴스를 보고 그에게 안부를 묻는 e메일을 보냈다. 한 시간도 안돼 답장이 왔다. “나와 가족들이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우한을 떠날 수 없는 건 사실이지만, 다행히 우리는 안전하고 건강해. 그리고 상황은 점점 나아지고 있으니까 우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걱정해줘서 고마워.” 그는 평상심을 유지하며 어려운 시간을 잘 견뎌내고 있었다. 봉쇄된 도시의 아수라장을 상상하던 머릿속의 구름이 조금 걷히는 기분이었다.

전염병에 대한 공포의 바이러스가 삽시간에 우리 일상을 장악했다. 공기를 통한 전염은 없다는 의학계의 발표가 있었음에도 신종 코로나 확진자들의 동선에 대한 구체적 정보가 메신저로 오가고 있다. 현지에서 이송되는 교민과 여행자의 집단 수용에 항의하는 시위현장은 님비라고만 치부하기에는 남의 일 같지 않으면서도 과장된 공포와 정치적 알력, 지역감정 등 복잡한 속내가 느껴진다.

신종 바이러스의 등장과 대응이라는 ‘스펙터클’은 우리가 얼마나 모순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우리는 광속의 세계에 사는 원시인들이다. 글로벌화된 세계에서 위험은 날개를 달았다. 모든 국가의 대도시를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연결한 항공망은 중국의 깊은 내륙 우한에서 출현한 바이러스를 빛의 속도로 지구 전체에 실어 날랐다. 보균자들의 동선을 보면 평소 의식하지 못했지만 우리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넓은 지역을 돌아다니는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동굴에 살던 원시인들처럼 박쥐를 먹으며(비록 종류와 양은 적을지라도 한국이 혐오식품 섭취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미처 장악하지 못한 야생의 침입으로부터 생명을 위협받는다.

우리는 여전히 편을 가르지만 협력할 수밖에 없다. 시련이 닥치면 혐오와 배제의 기제가 작동하는데 이번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인은 엊그제까지 환대하던 중국 관광객과 유학생을 무시하고 거부한다.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어서 유럽에서도 아시안을 깔보는 인종주의가 고개를 든다. ‘골칫거리 중국인’이라는 고질적 이미지가 차이나포비아를 부추기며 민족주의, 국가주의에 기대는 보수정당들은 이런 기회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려 든다. 그러나 이런 선정·선동의 한편에서는 치료제를 개발하려는 과학계의 분투가 이어진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바이러스의 염기서열을 해독하고 홍콩에서 백신을 임상실험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진다. 세계가 공동의 문제를 위해 노력하고 협력한다는 사실은 지속 가능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준다.

우리는 현대과학의 보편성을 맹신하지만 정작 어려울 때 필요한 것은 삶의 기술이다. 치료제 없는 전염병은 공포의 대상이며 이를 설명하는 과학의 언어는 냉철하다. 그러나 전파속도와 치사율이라는 통계의 배경에는 많은 변수들이 숨어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바이러스를 이기는 면역체계를 가졌으며 이는 평소 건강관리나 정신력과도 관련이 있다. 한방에서는 기침, 가래, 천식 등 폐 건강에 유익한 약재를 예방차원에서 권한다. 동양의 전통적인 양생이라는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면 백신이라는 유일한 방법에 기대는 것보다 다양한 해결책이 있다.

신종 바이러스의 등장은 우리가 어떤 세계를 만들어야 하는지 생각해보는 기회를 준다.

우리의 삶은 좀 더 소박해지고, 좀 더 문명화돼야 한다. 삶의 속도를 늦추고 좀 더 정신적인 삶에 치중하는 세계가 되면 좋겠다. 불필요하게 다른 생명을 먹는 식습관도 반성하게 된다. 박쥐를 먹는 식도락과 지나친 육식의 거리는 상식만큼 멀지 않다.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정의도 필요하다. 중국에서 신종 바이러스가 출현한 이유는 중국인의 야만성 때문이라기보다는 넓은 국토에서 각종 문제가 양산되기 때문이다. 글로벌화를 지향하면서 필요할 때만 민족, 국민의 특수성에 집착하는 것은 모순이다. 글로벌화에 맞는 세계시민으로서의 사고가 필요하다.

삶의 기술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다. 문명사회에서 우리의 몸은 전문가의 손에 맡겨져 있다. 보건의료 시스템도 중요하지만 내 몸을 지키는 건 나 자신이다. 우한에 사는 나의 지인이 평상심을 유지하는 이유는 이런 삶의 기술을 체득했기 때문이라고 짐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