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군의 행패 나타나기도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 / 51회] 사적인 감정에 치우친 공무집행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by 김삼웅(solwar)
동학농민군이 지역에서 자치권력을 행사하면서 여러가지 부작용이 나타나고, 사적인 감정에 치우친 공무집행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일부이지만 양반들을 잡아다 형벌을 가하면 그들이 재물을 갖다 바치기도 하고, 이들 중에는 시세에 편승하여 동학에 입도하는 자들도 생겼다.
동학농민군들은 떼를 지어 무기를 들고 마을을 활보하면서 부자집을 털기도 하고 여인들을 겁탈하여 비난을 사기도 했다. 심지어 양반집 처자를 끌어내어 장가를 드는 농민군도 있었다.
양반집에 딸이 있으면 수건을 문에 걸어두고 납폐(納幣)라고 했다. 한 번 수건을 걸어놓으면 처녀집에서는 감히 다른 데로 시집보내지 못했기에 이를 늑혼(勒婚, 강제로 혼인을 맺는 것)이라 했다. 이에 딸이 있는 사족과 향품(鄕品, 지방의 일을 보는 향청의 소임) · 필서(匹庶, 일반 여염집을 일컬음)는 늑혼을 피해 매파를 기다리지 않고 택일도 하지 않고 각각 끼리끼리 귓속말로 약속하여 물을 소반 위에 올려 놓고 손을 끌어 초례를 올렸다.
그리고 촛불을 들고 곧바로 신랑집으로 갔다. 시끄럽기가 미치광이 같아 민간에서는 이를 3일혼이라 했다. 오늘 맞대어 약속하고 명일 초례를 치르고 또 그 다음날 신랑집으로 갔다. 그래서 열네 살 이상의 처녀는 안방에 없었다.
동짓달이 끝날 쯤에는 이들이 늑혼을 하고자 해도 처녀들이 모두 젖내나는 어린이들로 머리를 틀고 비녀를 꽂고 있어서 이들이 안방을 엿보고 웃거나 욕을 해댔다. (주석 8)
동학농민혁명 시기에 이를 지켜보면서 일기를 쓴 사람이 있었다. 다음은 이 '일기'에 나타난 당시의 상황과 농민군 · 관군의 행패에 대한 기록이다.
7월 14일
동네 여러 사람과 같이 민간 보루(民間堡壘)를 구경하다.
한 달 동안에 인심세태(人心世態)가 전일과 크게 달라져 관아(官衙) 안에서 잡기(雜技)가 어지러이 일어나도 목사가 막지를 못한다. 성내에는 동학무리가 1천여 명이나 있는데 그들이 성명하기를, 앞으로 왜놈이 도처에 가득 찰 것이라고 하여 이 근처에는 동네마다 곳곳에 보루를 쌓고 있으며, 이 동네에도 북산(北山) 위에 보루를 쌓았다고 한다. 그 산은 높고 험준하여 한 사람이 창을 메고 있으면 만 명이 당할 수 없다고 한다.
처음에 임금이 초토사 홍계훈을 전주에 보내어 동학을 치게 하였다. 초토사가 동학군 속에 몰래 세작(細作)을 보냈는데 동학 우두머리가 갑자기 명령을 내려 모든 군사들이 황건(黃巾)을 쓰도록 하였다. 그러자 모두 황건을 썼는데 세작은 황건이 없어 쓰지 못했다. 우두머리가 말하기를 "너의 주장(主將)에게 가서 다시는 간사한 꾀를 쓰지 말라고 하라." 하였다.
그뒤 초토사가 세작에게 황건을 주어 다시 보냈다. 우두머리는 또 명령을 내려 모든 군사는 청건(靑巾)을 쓰라고 했다. 그러자 모두 청건을 썼는데, 세작은 청건이 없어 또 드러나게 되었다. 우두머리가 말하기를 "내가 너를 죽이지 않을 터이니, 돌아가서 너의 주장에게 병서를 더 읽고 오라고 하여라." 했다.
초토사는 다른 계책을 써서 토평(討平)은 했으나 마침내 우두머리는 놓치고 말았다. 구렁에 있는 죽은 사람의 머리를 몰래 가지고 와서 우두머리를 베었다고 거짓 장계(狀啓)를 올렸다.
병정들은 부인들을 강간하고 재화를 약탈하여 허리에 차고 상경하였다. 그러므로 전라도 전체가 먼저는 도적에게 약탈당하고 뒤에는 서울 병정에게 약탈당하여 재화가 비로 쓴 듯이 없어졌다. 그로 인하여 씨를 뿌리지도 못하고 양민이 다 도적이 되어 잠식(蠶食)하며 올라온다고 한다. (주석 9)
7월 23일
동학도가 신당시(新塘市)에 모이다.
이 때에 동학이 크게 일어나자 시골에 사는 백성은 거의 모두가 동학에 들어가 원수도 갚고 돈도 징발하는 등 마음대로 하였는데, 심한 사람은 남의 불알까지 뽑아놓았다. 그들은 기거 동작과 사물을 응접함에 있어서 매번 하늘에 고한다. 심지어 기침과 대소변 등의 사소한 일에도 다 하늘에 고한다. 혹 기술을 쓸 때에는 주문을 외우며, 또 잘 뛰어 마치 개구리와 같다. 가장 장관은 강신(降神)이란 것으로서, 허리 밑에는 모두 신에게 바치는 전내패(奠乃牌)란 것을 차고 있다. 신입자는 반드시 폐백을 가져가야 하며, 서로 부를 때에는 반드시 접장(接長) 또는 도인(道人)이라고 한다.
접주(接主) 아래 육임방(六任方)을 두었는데 방(方) 마다 다 같다. 그 제자가 선생에게 "이것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물으면 선생은 "한 집을 보전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다만 오래오래 뛰는 것이 기술입니까?"하고 물으면 선생은 "초학문을 익히고 엽등(獵登)을 말라. 뒤에 다섯가지 기술이 있으니 차차 가르쳐 주마."고 대답한다.
이렇게 어리석은 백성을 선동하여 산내ㆍ성내(城內)ㆍ성외(城外)에 무릇 6천 명이나 모였다. 말하자면 중국 한말(中國漢末)의 장각(張角)ㆍ장로(張魯) 같은 무리들이다.
이날 300명이 신당시에 모였는데, 마을 사람들은 감히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어떤 사람이 그들에게 재미가 어떠냐고 묻자 전연 재미가 없다고 하며, 또 기술을 몇 가지나 배웠느냐고 물으니 "아직 배우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했다. 다만 선생이 이르기를, 먼저 다섯가지 기술을 배운 뒤 다른 기술을 배운다고 하는데 어떤 기술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대개 동학에 모인 사람들은 부유한 자는 재물을 바치고 가난한 자는 얻어먹는다고 한다. (주석 10)
주석
8> 『오하기문』, 이이화, 앞의 책, 재인용.
9> 이면재(李冕宰), 「1894년(갑오) 일기」, 이정규 · 이조승 외저, 『의병운동사적』, 이구영 편역주, 현대실학사.
10> 이면재, 앞의 글, 357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