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걷고 싶은 서울 만든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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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대중잡지 ‘삼천리’에 재밌는 설문조사가 하나 실렸다. “내가 서울 여시장이 된다면?”

일제강점기 서울시장(경성부윤)은 당연히 일본인이 맡아 했다. 그러니 조선인, 더구나 여성은 시장이 절대 될 리 없는 애당초 불가능한 일을 가정한 질문이었다. 당대 유명 여성 대부분은 이 질문에 “모든 서울시민에게 영양주사를 한 대씩 놓고…” “허영심을 근절하기 위해 화장품 세금을 100배 인상하겠다”는 식의 진지하지 않은 ‘공약’을 남발했다. “제가 서울 여시장이라니 천지개벽을 하게요”라며 상상 자체를 부정한 답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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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들과는 달리 구체적인 정책을 내놓은 여성들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화가 나혜석이다. 나혜석은 전차 요금 구역제 폐지를 서울시정의 첫 번째 과제로 제시했다. 그는 “전차 서대문선과 마포선 간, 동대문선과 청량리선 간, 광희문선과 왕십리선 간을 하나의 구역으로 변경하겠다”고 했다. 당시 동대문과 남대문을 경계로 교외선으로 환승하려면 전차 요금 5전을 더 내야 했다. 이 때문에 일본인들이 주로 살던 도심에서 밀려나 교외에 거주하면서 도심으로 출퇴근하는 조선인들의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1930년대 경성에서도 교통 문제가 중요한 현안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주요한 대중교통수단으로 거리를 누볐던 전차는 점차 버스의 장애물로 변했다. 전차는 교통혼잡을 이유로 결국, 1968년 11월 멈췄다.

전차가 사라지고 버스가 들어선 서울은 해마다 변했다.

누군가 기막힌 요술이라도 부린 것일까. 차도는 계속 늘어났는데 도로는 여전히 막히고, 보행자는 밀려났다. 미세먼지의 주요 원인인 차량이 내뿜는 배출가스로 인한 경제 손실이 날로 커지면서 전 세계 대도시들은 도심에서 차량 운행을 제한하는 정책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1999년 스페인 폰테베드라에서 시작된 ‘차 없는 도시’ 캠페인은 어느새 세계 도시들의 공통 과제로 자리 잡았다. 지난 10월15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시 교통국 이사회는 2025년까지 가장 붐비는 거리인 ‘마켓 스트리트’를 전면 보행길로 바꾸는 안을 승인했다. 스웨덴 스톡홀름, 싱가포르, 영국 런던 등에서는 ‘차 없는 도시’로 가는 중간 단계로 ‘교통혼잡세’를 걷고 있다. 서울시도 이제는 보행자 우선의 ‘걷는 도시 서울’을 내세운다. 주요 도로 찻길을 줄이고 모두 보행자와 자전거에 내줄 방침이다. 4대문 안은 공해유발차량 진입을 차단하고 이달부터 과태료를 부과한다.

세계 도시들이 차 없는 도시를 추진하는 것은 단순히 공기질을 개선하고, 걷기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IT 전문매체 와이어드는 차 없는 도시 시행 효과에 대해 “도심의 차량 수가 줄어들수록 보행자들의 사회적 교류가 늘어 행복지수가 높아진다는 사실이 많은 연구에서 증명됐다”고 분석했다.

보행친화도시는 찻길을 줄이고 자전거길을 넓힌다고만 되는 것이 아니다. 2017년 12월 종로 중앙버스전용차로(BRT)를 개통하고 그 일대 보도를 넓혔지만, 보행자들이 늘어나 실제로 주변 상권이 살아났는지는 의문이다. 따릉이를 타고 광화문과 경복궁 주변만 다녀봐도 시내에 얼마나 많은 구릉지가 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서울 시내를 걸어보라. 돈을 지불하지 않고는 쉴 곳이 거의 없다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된다. 걷고 싶은 도시는 어디서라도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곳이다.이런 점에서 서울시가 내년부터 운행하기로 한 ‘녹색순환버스’는 반길 만하다.

85년 전 질문으로 돌아가자. “내가 시장이 된다면?” ‘땡땡~’거리며 전차가 도심을 달리게 하겠다. 종로 같은 구도심은 버스전용차로보다 전차가 더 효율적일지도 모른다. 전차는 매연도 배출하지 않는다. 마침 ‘노면전차’를 운행할 수 있도록 도로교통법이 개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