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래군 칼럼]대한민국은 인권 포기 공화국인가

by
http://img.khan.co.kr/news/2019/12/09/l_2019121001001050300088882.jpg

“우리 모두가 평등해질 때까지는 우리 중 누구도 평등하지 않다.”

세계적인 밴드 U2가 지난 8일 밤 내한공연을 하면서 이런 메시지를 발표했다. 세계인권선언 기념일인 오늘 U2의 이 메시지가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마음에 와닿는다.

http://img.khan.co.kr/news/2019/12/09/l_2019121001001050300088881.jpg

71년 전, 인류는 제2차 세계대전의 참극을 겪은 뒤 역사적인 반성문을 썼다. “인권에 대한 무시와 경멸은 인류의 양심을 짓밟는 야만적 행위”를 낳았고, 따라서 앞으로 인류는 “언론의 자유, 신념의 자유, 공포와 궁핍으로부터의 자유를 향유”하는 세계를 만들 것을 약속했다. 이 반성문 이후 인권은 현대국가들이 지향하는 보편적 가치가 되었다. 인권을 부정하거나 외면하는 일은 곧 비난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렇지만 이런 약속은 과연 지켜지고 있을까? 71년 전의 저 약속이 지켜졌다면 우리는 아마도 매우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저 고상한 약속을 한 인류는 이 선언을 만드는 과정에서조차 한편에서는 냉전체제를 짜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그 과정에서 끔찍한 학살과 국가범죄를 겪었다. 한국전쟁을 거쳐서 분단체제가 완성됨과 동시에 세계적 차원에서는 냉전체제가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인류가 합의하여 채택한 세계인권선언이 가진 권위는 막강했다. 그 뒤에 유엔 주도로 국제인권규약들이 속속 제정되었고, 유엔 중심의 국제인권레짐이 형성되었다. 우리나라도 1990년부터 주요 국제인권규약들에 속속 가입하여 인권 보장의 의무를 지게 되었다. 그럼 우리나라는 인권국가로 발돋움했을까? 예전 군사독재정권 때 공공연한 자의적인 체포와 구금, 고문은 사라졌다. 이제는 가짜뉴스를 공공연히 퍼뜨리면서 정권을 비판하는 대대적인 집회가 매주 주말마다 너무도 자유롭게 열리고 있다. 도리어 집회와 시위장에서는 혐오와 차별이 넘쳐나는데도 어떤 제재도 받지 않는다. 공포를 느끼지 않고 권력을 비판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었으니 얼마나 인권적인가?

그렇지만 ‘궁핍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이상과는 정반대로 진행되는 현상도 보고 있다. 세계적인 경제대국이 되었고, 국민소득도 3만 달러를 넘었다는 나라의 사회보장 수준은 너무 보잘것없어서 OECD 국가 최하위 수준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노동하면서도 ‘52시간 노동제’가 과도하다고 제1야당 대표가 비판한다. OECD 나라 중에 자살률이 가장 높고, 노인빈곤율과 노인자살률이 비정상적으로 높다. 경제성장의 결과는 고루 나누어지지 않고, 소수의 대기업과 부자들의 곳간에만 쌓인다. 그 한편에서는 의식주조차 해결하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는데도 사회복지 예산을 늘리자는 주장에는 어김없이 어깃장을 놓는다.

지난해 세계인권선언 기념일이었던 2018년 12월10일 밤에는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이 죽었다. 그는 1994년생, 만 스물네 살의 나이에 위험한 작업장에서 혼자 일하다가 죽었다. 그가 죽은 뒤에도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컨베이어벨트는 돌아갔고, 세 시간 뒤에야 그는 처참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최근 경향신문은 “오늘도 3명이 퇴근하지 못했다”는 타이틀을 뽑고, 김용균 이후 9월 말까지 산업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1200명의 명단을 실었다. 매일 위험한 현장으로 출근한 노동자 3명은 떨어져 죽고, 끼어 죽고, 깔려 죽고, 부딪혀 죽고, 무언가에 맞아서 죽어갔다. 거기에 산재로 얻은 질병을 앓다가 죽어가는 노동자까지 합하면 매일매일 6명씩 죽어나간다.

우리는 매일 37명 이상이 자살하는 나라, 매일 노동자 6명이 죽어가는 나라, 매일 교통사고로 10명 이상이 죽어가는 나라다. 전쟁이 일어나는 나라도 아닌데 이렇게 많은 목숨들이 죽어가는 데도 아무렇지 않다. 그렇게 죽어가는 게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게 더 문제다. 이 나라는 그만큼 위험한 나라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세계인권선언 제3조는 생명권과 안전권을 천명한다. 생명을 보전할 수 없는 질서와 체제에서는 인권의 실현은 기대할 수 없다. 산업현장에서 노동자가 죽어나가도 기업주는 벌금으로 평균 450만원만 물면 그만이다. 어린이 안전을 위한 ‘민식이법’을 만들어 달라고 무릎 꿇고 호소하는 유가족 어머니들을 국회의원들은 매몰차게 외면하고, 시민들은 그 어머니들을 비난하는 댓글들을 줄줄이 달고 있다. 고 노회찬 의원은 “안전의무를 소홀히 해 얻는 이익보다, 재해를 일으켰을 때 얻는 불이익이 적다면, 기업의 철저한 안전관리는 사실상 기대하기 어렵다”며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발의했지만 20대 국회에서 단 한 번도 심의조차 되지 않았다.

사람의 목숨보다 기업의 이윤을 우선하는 법과 제도를 국회가 만들고, 기업의 편의를 최대한 봐주는 행정을 펼치고, 사법부는 노골적으로 기업들의 편을 들어준다. 노동자와 시민의 목숨쯤은 돈으로 보상하면 끝이라는 잔인한 체제, 소수 ‘사회적 특수계급’을 위한 체제가 버젓이 들어선 나라인 대한민국은 인권 포기 공화국이다.

세계인권선언은 전문과 30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사회권)들이 22조부터 27조까지 열거되어 있다. 여기서 열거된 주장이 어찌 복지병이고, 사회주의 하자는 것인가. 이제 경제대국을 자랑할 때가 아니라 매일 억울하고 불행한 죽음의 행렬이 이어지는 현실을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할 때다. 그러므로 이제 개별 권리를 보장하라고 목소리 높여 주장하면서도 우리는 이 잘못된 질서와 체제를 바꿔야 한다. 누군가를 고통에 몰아넣고 그 고통 위에서 누군가는 행복을 누리는 체제라면 그건 신분제 사회일 뿐이다.

세계인권선언 제28조는 “모든 사람은 이 선언에 제시된 권리와 자유가 완전히 실현될 수 있는 사회적 및 국제적 질서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고 선언한다. U2가 제시한 것처럼 “모두가 평등해질 때까지” 우리가 들어야 할 구호는 세계인권선언 제28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