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아 칼럼]구하라와 설리, 그리고 U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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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선 당신의 이름 석 자는커녕 이니셜조차 언급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 사건이 ‘최○○ 동영상 협박 의혹 사건’으로 명명돼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세상이 달라졌습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리벤지포르노범들 강력 징역해주세요’라는 청원엔 21만8000여명(2018년 10월8일 현재)이 동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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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최종범 사건’이 터졌을 때 쓴 글입니다. 제가 틀렸습니다.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지지한 수십만명은 미약했습니다. 악의를 품고 집요하게 공격하는 이들, 세상의 질서를 바꿔놓을 ‘권위’를 가진 이들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구하라. 당신이 떠난 지 보름이 지났습니다. 그사이 외주 스태프 여성 2명을 성폭행·추행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배우 강지환씨가 집행유예로 풀려났습니다. 피해자들이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게 이유입니다. 학생 28명을 49차례 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교사는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집행유예를 받았습니다. 징역 형량은 2년에서 1년6월로 줄었습니다. 파면당한 점을 고려했다고 합니다.

당신에게 낯설지 않은 일들일 겁니다. 서울중앙지법 오덕식 부장판사는 지난 8월 최종범씨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습니다. 협박·강요·상해·재물손괴 등을 유죄로 인정하면서도 불법촬영 혐의는 무죄로 판단했습니다. 당신의 명시적 동의 없이 촬영한 게 맞다면서도 “피해자 의사에 반한 것으로 단정짓기는 어렵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이 연인 관계였다는 사정 등을 근거로 들었습니다. 부부강간죄가 존재하는 나라에서 이런 법리를 내세우다니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선 ‘가해자 중심적인 성범죄 양형기준을 재정비해 달라’는 청원이 진행 중입니다. 청원인 수가 답변 요건 20만명을 넘어섰습니다. 공감합니다. 피해자와의 합의가 형을 깎아주는 근거가 돼선 안됩니다. 하지만 양형기준만 개정되면 성범죄 수사·재판이 달라질까요. 2012~2017년 불법촬영 혐의로 재판받은 피고인중 실형 비율은 8.7%뿐입니다(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 자료). 불법촬영을 직접적 가해 행위가 아니라는 이유로 가볍게 보기 때문입니다. 피해자들은 죽음을 떠올릴 만큼 공포를 겪지만 법원과 검경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수사·재판 기관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최근 한 어린이집에서 5세 남아가 동갑의 여아를 성추행했다는 의혹이 불거졌습니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발달과정에서 나타난 자연스러운 모습”(12월2일)이라고 했다가 사과했습니다. 사흘 만에 또 “성폭력이란 용어는 부적절하다”(12월5일)고 했습니다. 5세 아동을 형사처벌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폭력이 아니다’라고 규정하는 일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5세 남아가 동갑 남아를 때려 다치게 했더라도 박 장관이 이렇게 말했을까요. 대한병원의사협의회는 “가해 아동의 행동은 정상적 발달과정의 연장선에서 생각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핵심은 사회 전반의 후진적 젠더감수성입니다. 여성을 동료 시민으로 존중하기보다 성적 대상·객체·상품으로 바라보는 구조입니다. 남성의 성적 욕망에는 관대하고, 여성의 아픔에 대해선 무감각한 구조를 바꿔야 합니다. 아일랜드 출신 록밴드 U2는 지난 8일 내한공연에서 ‘울트라바이올렛’을 부르며 당신의 친구 고 최진리(설리)씨를 추모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평등해질 때까지는 우리 중 누구도 평등하지 않다”는 메시지도 띄웠습니다. 비슷한 시간 ‘국가기간방송’ KBS에선 중단됐던 <1박2일>의 시즌4를 열었습니다. 정준영씨가 빠졌으니 괜찮은 걸까요?

힘없는 존재들의 정체성은 한데 뭉뚱그려져 ‘범주화’됩니다. 여성, 청년, 노인, 장애인, 성소수자, 유색인종이 그렇습니다. ‘구하라’의 자리는 없고 ‘여자 아이돌’의 자리만 남지요. 힘센 존재들의 정체성은 ‘개별화’됩니다. 남성, 중장년, 비장애인, 이성애자, 코카서스인종(백인)이 그렇습니다. 죽어서는 격차가 더 커집니다. 역사의 기록은 강자의 몫이니까요. 한국 역사를 바꾼 여성들의 대열에 최진리씨를 함께 세우며 기억한 U2에 고마워하는 이유입니다.

저도 당신과 당신의 친구를 새롭게 기억하려 합니다. 당신은 생전에 ‘정준영 단톡방 사건’ 취재에 도움을 주었지요. 사건을 취재했던 기자가 털어놓은 이야기입니다. 최진리씨는 취약계층 여성들을 위해 유기농 생리대를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그가 떠난 뒤 5억원 상당 생리대가 기부됐습니다. ‘당신들’이 ‘악플로 고통받다 떠난 젊은 여성들’로만 기억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구하라와 설리는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행동했던, 용기 있고 아름다운 여성들로 기록돼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