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경철 국장 "KBS 취재기자 20~30% 출입처에서 뺀다"
[현장] 출입처 폐지 토론회 "보도국 일간·주간·이슈 담당 구분... 조직 개편도 검토"
by 김시연(staright)
"내년 초 부서별로 20~30%는 출입처에서 자유로운 기자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엄경철 KBS 신임 보도국장이 9일 오후 서울 중구 저동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열린 '취재 관행 개혁을 위한 방안 모색' 토론회에 참석해 자신의 '출입처 폐지 선언'을 뒷받침할 구체적인 청사진을 밝혔다.
엄 국장은 이날 "현재 KBS 취재기자 95%가 출입처 갖고 있는데, 매일 보도자료가 나오면 받아쓰기 수준으로 정리한 뒤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고찰해 당일 바로 뉴스가 나오는 구조"라면서 "부서별로 데일리(일간) 담당, 위클리(주간) 담당, 이슈기획을 전담하는 기자를 만들어 자율적으로 논의해 달라고 제안했고, 자율적으로 안 되면 조직 개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엄 국장은 지난달 보도국장에 임명된 뒤 "반드시 필요한 영역과 역할을 제외한 출입처를 폐지하겠다"고 선언했다. 때마침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유튜브 방송 <알릴레오>를 통해 조국 전 법무부 장관 가족 수사 관련 KBS 검찰 출입기자 보도 문제점을 거론해 논란이 된 상황이어서 더 큰 관심을 끌었다.
"출입처 구조가 심층 보도 방해... 과감한 투자 필요한 때"
민주언론시민연합(민언련)과 전국언론노조, 한국언론정보학회, 미디어공공성포럼 등이 공동주최한 이날 토론회 화두 역시 출입처 폐지였다. 사회자인 정연우 민언련 상임대표와 발제를 맡은 박영흠 협성대 초빙교수, 이정훈 신한대 교수를 제외한 나머지 토론자는 엄경철 국장, 문소영 서울신문 논설실장, 박상규 진실탐사그룹 <셜록> 기자, 김주완 <경남도민일보> 이사 등 현업 언론인들로 구성됐다.
엄 국장은 "출입처 혁파 대신 폐지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현실적으로 출입처에서 자유로운 기자를 좀 더 많이 만들어보자는 것과, 출입처에 나가더라도 출입처 중심이 아닌 사고를 갖도록 화두를 던지자는 것이었다"면서 렌터카 승차 공유서비스인 '타다' 보도 사례를 들었다.
엄 국장은 "타다 논쟁은 단순히 타다와 택시업계 찬반 논쟁뿐 아니라 산업적 측면, 소비자 측면에서 다양한 논쟁 층위가 있는데 국토교통부 출입기자는 제도의 찬반만 바라보고 산업 쪽으로는 가지 않는다"면서 "논쟁의 다양성을 추적하기엔 출입처 구조가 답답하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엄 국장은 "이런 출입처 구조가 9시 뉴스에 복무하고, 9시 뉴스가 출입처 제도를 강화하는 구조가 수십 년 동안 이어져 왔다"면서 "이런 구조를 탈피하려면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영역과 무관하게 한 기자가 깊게, 오래 취재해서 심층 보도로 갈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한데 현재 출입처 구조가 방해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엄 국장은 "부장단에서 출입처를 줄이고 다른 방식의 취재시스템에 공감해도 일선 기자까지 가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면서 "KBS는 공영방송이고 구성원 각자의 취재 자율성과 판단이 존중되는 민주적 과정을 통해 작동될 수밖에 없어 제대로 된 대안을 가지고 세팅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고민이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엄 국장은 KBS 이사회에 뉴스 콘텐츠 생산에 투자를 요청했다고 밝혔다. 엄 국장은 "과거 뉴스 콘텐츠는 거의 재원이 투자되지 않고 사람의 힘으로만 만들 수 있는 콘텐츠였다"면서 "깊이 있는 정보를 얻고 깊이 있게 분석하고 좋은 콘텐츠를 만들려면 과거처럼 기자 개개인에게 맡기지 말고 주변 전문가 그룹을 취재망에 강하게 결속시켜야 하고 그러면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엄 국장은 "내년 초 출입처에서 자유로운 기자를 20~30% 정도 만들자고 부장들에게 제안했다"면서 "사회부는 이미 출입처 없는 이슈팀이 있고 정치팀도 이달 초부터 출입처 기자 4명을 빼서 순수하게 정치기획, 탐사 보도 하는 팀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엄 국장은 "취재기자들이 막막해한다"면서 "뉴스를 생산하는 데 시간과 품 많이 들고 생산성이 굉장히 낮은 건 잘 알지만 그런 뉴스가 있어야 KBS 뉴스에 대한 (시청자의) 기대에 맞출 수 있다"고 강조했다.
"언론사가 살아남으려면 스스로 출입처에서 나와야"
과연 이같은 KBS의 실험이 다른 언론사로도 확산될 수 있을까? 이날 토론자들은 KBS의 출입처 폐지 방침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출입처 폐지 확대에 따른 부작용도 우려했다.
입사 초기 취재원 접근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문소영 서울신문 논설실장은 "한국 관료들의 '응답책임성'을 고려할 때 출입처 폐지 부작용은 심대할 것"이라면서 "지금 나는 취재원 네트워크가 있어 출입처가 필요 없지만 초년 기자에겐 치명적일 것"이라고 밝혔다.
<오마이뉴스> 기자로 일하다 탐사보도 전문매체를 만든 박상규 <셜록> 기자도 "하루아침에 출입처를 폐쇄하겠다고 하면 기자들 반발을 부르고 개혁은 좌초하게 될 것"이라면서 "출입처를 완전히 폐지하기보다 줄여나가는 게 맞다"고 밝혔다.
다만 박상규 기자는 "언론 위기 상황에서 콘텐츠를 다변화하려면 언론사 스스로 출입처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면서 "(출입처 폐지가 성공하려면) 데스크와 기자들의 뼈 깎는 노력이 필요하고 신문 지면을 줄이거나 단신 위주에서 '롱텀(심층보도)'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출입처 제도 단계적, 점진적 폐지를 제안한 박영흠 협성대 미디어영상광고학과 초빙교수도 "기자들은 대체로 (언론계 내부의) 현실을 들어 출입처 폐지를 반대하는데, 더 크고 무서운 뉴스룸 바깥의 현실을 감안하면 출입처는 반드시 없애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언론의 신뢰와 권위가 세계 꼴찌 수준이고 시민들, 특히 젊은 세대들이 기성 미디어를 떠나고 있고 '기레기'라는 조롱과 경멸에 시달리는 기자들은 고강도 노동과 직업 스트레스로 정서적 소진 상태에 이르고 있다"면서 "이대로 가면 언론의 미래는 없다, 다가올 파국을 기다리며 서서히 공멸하는 길 뿐"이라고 강하게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