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바이오 증거인멸 유죄', 1심 판사가 검사에게 던진 말
[분석] 사건 배경에서 '이재용 승계작업' 등 직권 삭제... 수사 장기화, 과다한 압수수색 지적도
by 박소희(sost)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부정사건의 지류, 증거인멸사건 1심에서 검찰이 공소사실 하나를 빼고는 전부 유죄 판결을 받아냈다. 하지만 본류인 회계부정사건에서 더 나아가 사건의 출발점, '이재용 경영권 승계작업'에 이르기까지가 만만찮은 작업이라는 점도 확인됐다.
9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4부(부장판사 소병석)는 삼성바이오 회계부정사건 관련 증거를 없애거나 감춘 혐의로 기소된 삼성전자 재경팀 이아무개 부사장에게 징역 2년, 사업지원TF 소속 박아무개·김아무개 부사장에게 징역 1년 6개월 실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들이 검찰의 삼성바이오 수사를 앞두고 부하직원들에게 증거인멸과 은닉을 지시한 혐의 대부분을 인정했다. 무죄가 나온 공소사실도 해당 직원이 이미 증거인멸을 마음 먹었기 때문에 증거인멸 교사가 안 된다는 취지였다.
재판부는 또 가담 정도나 지위 등을 고려해 현재 구속 중인 부사장 세 명에게 모두 실형을 선고했고 이들의 보석 신청을 기각했다. '실행자'격인 백아무개 삼성전자 재경팀 상무와 보안선진화TF 서아무개 상무, 양아무개 삼성바이오에피스 상무는 징역 1년 6개월·집행유예 3년, 이아무개 삼성에피스 부장은 징역 1년·집행유예 2년, 안아무개 삼성바이오 대리는 징역 8개월·집행유예 2년에 처했다. 네 사람은 모두 80시간 사회봉사 명령도 받았다.
'이재용 승계작업' 공소장에서 지운 재판부
그런데 이날 선고 과정에서 재판부는 직권으로 공소장 일부 문구를 삭제했다. 이 사건의 발단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작업에 있다는 부분이었다.
증거인멸 및 은닉(교사 포함)은 타인의 형사사건에 관한 증거를 없애거나 감추는 범죄다. 검찰은 공소를 제기하며 이 부사장 등 삼성그룹 임직원들의 증거를 인멸·은닉하려 했던 타인의 형사사건을 삼성바이오 회계부정사건으로, 그 사건의 배경은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작업 등으로 명시했다. 반면 변호인단은 삼성바이오 회계부정 자체가 확정된 사건이 아니고, 경영권 승계작업도 증거인멸과 무관하다고 주장해왔다.
9일 재판부는 이 대목에서 사실상 변호인단 손을 들어줬다. 소 부장판사는 경영권 승계작업의 하나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무리하게 추진됐고, 그 결과 삼성바이오 회계부정으로 이어졌다는 내용은 "적어도 증거인멸죄 구성요건인 타인의 형사사건이라고 할 수 없는 기재"라고 지적했다.
또 "피고인들의 증거인멸 행위가 있을 당시에는 장차 삼성바이오의 삼성바이오에피스 지분 관련 부정한 회계처리, 구 제일모직의 자회사로서 삼성바이오 가치평가, 삼성바이오 유가증권시장 상장에 대해 형사사건 수사가 예측 가능한 상황이었다"고 했다. 일단 삼성바이오 회계부정까지만 증거인멸 사건과 연관성 있다고 선을 그은 셈이다.
"아직 기소조차 안 해... 삼성 압수수색만 36회"
재판부는 검찰의 삼성바이오 수사도 에둘러 비판했다. 소 부장판사는 "(피고인들이) 인멸·은닉한 증거 중 상당한 양의 자료가 수사기관에 확보돼 수개월간 수사가 진행됐음에도 타인의 형사사건에 해당하는 삼성바이오 사건은 아직 기소조차 안 됐다"고 말했다.
또 "피고인들은 삼성그룹이 2016년 11월 8일부터 2018년 4월 26일까지 15회, 월 평균 1회꼴로 압수수색 당하고 2018년 7월 10일부터 2019년 9월 23일까지 21회 압수수색 당하는 등 공공연하고 반복적인 압수수색에 대비해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자료를 삭제하는 차원에서 삭제·은닉했다고 주장하는데, 경청해야 할 부분이 없는 건 아니다"라고 했다. 다만 "이 사정이 범행을 정당화시킬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못박았다.
이 사건 유죄가 곧 삼성바이오 사건 유죄는 아니다. 검찰도 첫 공판부터 '이재용 부회장 경영권 승계작업 등이 있었다'가 공소사실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이런 의혹이 있으니 수사기관이 판단을 해야 하는데, 이 기준이 될 증거들을 피고인들이 없앴다고 했을 뿐이다..
하지만 9일 재판부는 직권으로 공소장 일부 내용을 삭제할 정도로 이재용 경영권 승계작업→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삼성바이오 회계부정→그룹차원의 증거인멸·은닉이란 큰 흐름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봤다. 또 검찰의 수사 장기화를 꼬집었다. 자칫 더 나아가면 공소 제기를 둘러싼 법정 공방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부분이다.
지류에서 본류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검찰에겐 또 다른 숙제가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