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와 '아름다운 썰전' 벌인 고봉을 아십니까
월봉서원에 가다... 세대·신분·지역 넘어선 조선 대학자들의 브로맨스
by 임영열(youngim1473)
성리학을 바탕으로 설립 운영됐던 조선시대 교육기관은 '향교(鄕校)'와 '서원(書院)'으로 구분된다. 향교는 법령에 의해 전국의 부·목·군·현에 설립돼 국립으로 운영됐다. 서원은 지방의 명망 있는 인사들이 성리학의 이념을 전파하고 교육할 목적으로 그들이 존경하는 스승과 선현들의 연고지에 세운 사설 교육기관이다. 요즘의 '사립학교'와 같은 곳이다.
16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세워지기 시작한 서원은 '선현들의 제향과 후학을 양성한다'는 설립 취지에 맞게 운영됐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 공교육을 무력화시키고 당쟁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폐단을 낳기도 했다. 지난 7월에는 한국의 서원 9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그 가치를 인정받은 바 있다.
호남 성리학의 거두, 고봉 기대승을 제향 하는 '월봉서원'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 너브실 마을에는 조선의 대학자,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 1527~1572)을 제향하고 있는 월봉서원(月峰書院)이 있다. 비록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지는 않았지만, 서원이 배향하고 있는 위대한 성리학자의 학문적 깊이는 세계문화유산의 가치를 훌쩍 뛰어넘는다.
월봉서원으로 향한다. 철학자의 마을로 가는 길은 입구부터 예사롭지 않다. 광주광역시에 속하지만 전형적인 시골 마을로 전라남도 장성군과 접해 있다. 마을 이름, 광곡(廣谷)은 넓은 골짜기라는 뜻으로 우리말로 '너부실 마을'이라고 부른다. 행주 기씨 집성촌이다.
앞으로는 장성에서 발원한 영산강의 지류, 황룡강이 흐르고 뒤로는 백우산이 포근히 감싸고 있는 전형적인 배산 임수형의 명당터에 자리를 잡은 마을이다. 잘 정리된 황토 돌담길을 따라 약 100미터 걷다 보면 마을 안쪽 깊숙한 곳에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는 철학자의 집을 만날 수 있다.
호남 성리학의 거두, 고봉 기대승과 광주와의 인연은 기묘사화(己卯士禍)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대로 서울에 살았던 기대승의 아버지 기진(1487~1555)은 그의 동생 기준(1492~1512)이 기묘사화에 연루돼 사사되고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자 남행을 결심한다.
피비린내 나는 사화(士禍)를 피해 정든 고향을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정착한 곳이 광주 소고룡리,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이다. 기대승의 아버지 기진이 광주에 처음 터를 잡았던 신룡동 용동마을 입구에는 기진의 유허비가 서있다. 고봉 기대승이 태어난 마을이다.
퇴계 이황과의 인연, 그리고 '사칠 논변(四七論辯)'
어려서부터 비범하고 총명했던 기대승은 7~8세의 어린 나이에 소학과 효경을 떼고, 23세 때 사마시에 응시해 진사·생원의 양과에 합격했다. 32세가 되던 1558년에 식년 문과 을과(文科乙生科)에 장원으로 합격했다. 이때부터 승문원부정자와 예문관검열 등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홍문관 부수찬겸 검토관이 되어서는 언론의 개방을 역설하기도 했다.
1558년 문과에 등과 하면서 관직을 제수받은 고봉은 서울로 올라와 평소 흠모했던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집을 방문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처음으로 만난 자리였지만, 두 사람은 마치 십년지기와도 같았다.
두 사람의 지위와 신분 지역 차이는 컸다. 당시 퇴계는 58세로 학문으로는 현인의 경지에 이른 '성균관 대사성', 지금으로 보면 서울대학교 총장이었다. 반면, 32세의 고봉은 이제 막 과거에 급제한 초급 관료였다. 영남과 호남이라는 지역과 26세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퇴계는 열린 마음으로 고봉을 논쟁의 상대로 받아들였다.
이날 이후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리나라 학문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이른바 '사단 칠정 논변'의 서막을 열었다.
"병든 몸이라 문 밖을 나가지 못하다가, 어제는 마침내 뵙고 싶었던 바람을 이룰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먼길에 몸조심하십시오. 덕을 높이고 생각을 깊게 하여 학업을 추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퇴계는 문과에 갓 급제한 새내기 관료 고봉과의 만남을 기뻐하며 이렇게 편지를 썼다. 고봉 또한 흠모하던 스승에게 존경심을 가득 담아 답장을 보냈다.
"멀리서나마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늘 마음속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해 다행히 선생님을 찾아뵐 수 있었습니다. 삼가 가르침을 가까이에서 받고 보니 깨닫는 것이 많아 황홀하게 심취했고, 그래서 머무르며 모시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 사이의 편지는 1570년 12월, 퇴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됐다. 특히 1559년부터 1566년까지 8년간 치열하고, 때로는 까칠하게 이어진 120여 통의 편지 토론은 '사칠논변(四七論辯)'이라 불리며 학자들간의 논쟁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보여줬다. 우리나라 성리학 역사의 빛나는 '사상 로맨스'로 평가받고 있다.
여기서 잠깐, 두 사람이 날 선 공방을 주고받았던 사칠논변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보고 가자. 사칠(四七)이란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을 뜻하는 것으로,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는 인·의·예·지(仁·義·禮·智) 4가지 마음과 희·로·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慾)의 7가지 감정을 말한다.
퇴계는 사단은 이(理)가 발함에 기(氣)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함에 이가 따르는 것으로 "사단과 칠정은 서로 다르다"는 '이기이원론'을 주장했다. 반면, 고봉은 "사단과 칠정이 모두 정(情)이다"라고 하며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에 입각한 주정설(主情說)을 주장하며 퇴계의 이기이원론을 반박했다.
퇴계는 편지 토론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하급 관리에 불과한 고봉의 학식을 존중하여 그의 이론을 상당 부분 수용했다. 이 논쟁은 향후 조선 성리학의 초석이자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학문적 논쟁을 뛰어넘어 아름다운 '사제의 연'으로
두 사람의 토론은 학문을 뛰어넘어 끈끈한 사제의 연으로 이어졌다. 퇴계가 벼슬을 마치고 고향 안동으로 떠날 때, 고봉은 한강의 배 위에서 '퇴계 선생을 보내며'라는 시로 스승과의 이별의 아쉬움을 읊었다.
한강수는 넘실넘실 밤낮으로 흐르는데
선생님의 이번 떠나심 어찌하면 만류할꼬
백사장가 닻줄 잡고 머뭇거리는 곳에
이별의 아픔에 만섬의 시름 끝이 없어라
퇴계도 고봉의 시에 화답시를 지어 석별의 정을 나누며 제자와의 헤어짐을 못내 아쉬워했다.
배에 나란히 앉았으니 모두 다 좋은 사람
돌아가려는 마음 종일 끌리어 머물렀네
한강물 다 가져다 행인의 벼루에 더하여
이별의 무한한 시를 써내고 싶어라
참으로 아름답고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별의 장면이다. 퇴계가 서울을 떠나고 난 뒤 고봉은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고, 대사간과 공조 참의를 제수받았으나 병환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던 중 정읍 고부에서 별세했다. 1572년 고봉의 나이 46세였다.
고봉 사후 6년 뒤 1578년 지금의 광산구 신룡동 낙암에 호남의 유생들이 '망천사'라는 사당을 짓고 고봉의 위패를 모셨다. 그 후 임란으로 소실돼 비아면 산월리 월봉 마을로 옮겨졌다. 1655년(효종 5년)에 월봉서원으로 사액됐으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됐다.
그 뒤 1938년 지금의 자리에 유림들에 의해 '빙월당(氷月堂)'이 지어지고 사당과 장판각, 내·외삼문이 건립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월봉서원의 중심건물인 빙월당은 정조가 고봉의 저서 '논사록(論思錄)'을 읽은 후 그의 학덕을 '빙심설월(氷心雪月)'과 같다고 평가한 데서 비롯됐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9호로 지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