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개혁과 패스트트랙] [국회 파행]한국당 뜬금없는 필리버스터…민생법안 볼모 '어깃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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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버스터 전격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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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당 “필리버스터 보장”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맨 앞)와 의원들이 29일 민생·개혁법안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신청한 뒤 여야 4당이 ‘본회의 무산’으로 대응하자 국회 본회의장에서 필리버스터 보장을 촉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의원 108명이 1인당 4시간씩’ 계획…공수처법 상정부터 막기
나경원 “한명 한명의 연설이 독재세력에 대한 심판의 울림”
당리당략만 고려한 ‘어깃장 정치’에 국회 무력화 비판 나와

자유한국당이 29일 선거제 개편·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 등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 법안’ 저지를 목표로 하는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선언했다. ‘한국당 대 여야 4당’ 구도에선 패스트트랙 법안 저지가 어렵다고 보고 마지막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다음달 3일 이후 예정된 공수처법의 본회의 상정부터 막고 ‘무제한 토론’으로 여론전을 펴는 등 시간을 벌겠다는 계산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패스트트랙 협상 내내 ‘어깃장’을 놓고, ‘민생법안’까지 볼모로 극한투쟁을 선택했다는 비판이 고조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국회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오늘 본회의에 상정된 모든 법안에 필리버스터를 신청했다”며 “한국당 의원 한명, 한명의 연설이 독재세력에 대한 준엄한 심판의 울림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나 원내대표는 “공수처는 이 정권의 추악한 비리와 부패를 덮고 ‘친문(문재인 대통령)무죄, 반문유죄’ 사회를 만들겠다는 공포 수사처,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대한민국을 망치려는 포퓰리즘 세력의 야합 선거제일 뿐”이라며 “이 저항의 대장정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불법 패스트트랙의 완전한 철회 선언과 ‘친문(문재인 대통령)게이트’ 국정조사 수용”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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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한국당, 국회 파괴”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앞줄 가운데)와 의원들이 29일 국회 본관에서 자유한국당의 민생·개혁 법안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 신청을 비판하는 내용이 적힌 손팻말을 들고 규탄집회를 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더불어민주당이 이날 본회의에 불참해 ‘무산 전략’으로 대응하면서 일단 필리버스터는 연기 됐다. 하지만 한국당은 의원 108명 중 대부분이 참여해 1인당 4시간씩 필리버스터를 한다는 등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언제든지 가동할 준비를 마쳤다. 이날 본회의 상정이 예고된 법안은 모두 200여건으로, 국회법상 한 건당 최소 24시간씩 필리버스터가 가능하기 때문에 한국당으로선 정기국회가 끝나는 12월9일까지 ‘총알’이 충분한 셈이다.

한국당 내부적으로도 필리버스터 계획이 이날 오후 의원총회에서 처음 의원들에게 공유된 것으로 전해졌다. 오전까지만 해도 나 원내대표는 기자들과 만나 필리버스터 신청 여부에 대해 “아직은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답했다. 당초 공수처법 본회의 부의일인 다음달 3일 이후 필리버스터 신청 가능성이 거론됐지만, 한국당은 이를 앞당겨 ‘허’를 찌르겠다는 전략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선 이날 나 원내대표가 입원 중인 황교안 대표를 만나고 온 뒤 ‘필리버스터 카드’를 꺼내든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지난 27일 부의됐고, 민주당이 ‘선거법·공수처법 동시 처리’를 공식화한 상황에서 공수처법 본회의 상정 자체를 막는 게 최선이란 판단을 했을 법하다.

하지만 한국당은 민생법안을 볼모로 의회 방해 행위에 나섰다는 비판을 면키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유치원 회계투명성 강화에 중점을 둔 ‘유치원 3법’, 스쿨존 내 과속 관리를 강화하는 ‘민식이법’ 등 중요한 민생법안이 이날 본회의 처리를 앞두고 있었다. 당장 내년도 정부 예산안의 본회의 의결 법정시한인 12월2일 내 처리도 불투명하다.

나 원내대표는 이 같은 여론을 의식해 “선거법을 상정하지 않는 조건이라면, 우리가 필리버스터를 신청한 법안에 앞서서 민식이법 등을 먼저 상정해 통과시켜 줄 것을 문희상 국회의장에게 제안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논란은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당장 ‘민식이법’ 통과를 촉구하는 부모들이 “왜 우리 법을 협상카드로 삼느냐”고 분통 섞인 울음을 터트렸다. 나 원내대표는 추가 기자회견을 열고 “민식이법을 먼저 처리하자고 했는데 문 의장이 본회의를 열지 않고 거꾸로 (책임을) 덮어씌우는 상황”이라며 “유치원법은 우리가 오늘 수정안을 냈고, 원안은 찬성할 수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당리당략만 고려한 한국당의 ‘대결 정치’ ‘어깃장 정치’가 국회를 무력화했다는 비판이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당은 2018년 말 선거제 개편 논의가 본격화된 뒤 ‘의원정수 270석 축소·비례대표제 폐지’ 같은 여야 합의 취지에 어긋나는 법안을 발의하며 협상 무력화를 시도했다. 또 지난 4월 선거법·공수처법 패스트트랙이 시작된 이후엔 5당 대표의 정치협상회의 등 공식 협의체를 내팽개치고 장외집회와 황교안 대표 단식 등 극한투쟁을 동원하는 데만 골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