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염치를 잃은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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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시작되기 직전, 특별한 관객이 들어왔다. 아이를 안은 여성이었다. 살금살금 들어온 그는 아이의 머리를 감싸고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 아이는 곤히 자는 듯했다. 나처럼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는 걸까, 그저 육아에 지쳐 집 밖으로 나올 구실이 필요했을까? 상관없었다. 그저 아이가 효도하여 그가 무사히 영화 엔딩 크레딧을 보게 되길 바라며 영화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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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풍경이 떠오른 이유는 영화 <겨울왕국 2>를 두고 뜻밖의 논란이 일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소음 때문에 영화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는 어른들이 ‘노키즈(No Kids)관’을 요구한 것이다. ‘전체관람가’ 영화에 노키즈관을 요구한 것도 황당하지만, 어느 중앙 일간지는 “여러분은 노키즈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라는 온라인 설문 조사를 하여 논란을 부추겼다. ‘이게 언론이 할 짓인가?’라는 건 둘째치고, 70%가 넘는 응답자가 ‘아이 소음에 방해받지 않고 영화를 볼 권리가 있다’고 응답한 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실 나도 <겨울왕국 2>를 보러 간 날 ‘관크(관객 크리티컬 : 극장이나 공연장에서 관람에 방해를 주는 관객 행위)’를 여러 번 당했다. 첫 번째는 오른쪽 옆자리 남성이었다. 팝콘을 쩝쩝 소리 내어 먹으며 수시로 내 쪽을 향해 팝콘 부스러기를 탈탈 털어내 몰입을 방해했다. 두 번째는 앞자리 남성이었다. 챙이 높은 모자를 벗지도 않고 앉은 바람에 시야가 가려져 요리조리 피해 자막을 봐야 했다. 세 번째는 내 왼쪽 옆자리 커플이었다. 영화 시작 후 입장하느라 자리를 찾는다고 휴대폰을 켜고 들어온 것도 모자라 한동안 속닥거리며 ‘관크’를 했다. 어른의 부적절한 행동에 방해받지 않고 영화 볼 권리가 있는 나는 노어덜트(No Adult)관이나 노맨(No Man)관, 노커플(No Couple)관을 요구하면 될까?

누군가는 그건 매너 없는 개인의 문제라고 선을 그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날 나의 영화 관람을 방해한 이들의 문제를 전체 어른(남성)의 문제로 비약하는 건 정당하지 않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그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게 문제다. 특히 우리 사회는 사회적 약자에게 유독 비정하다. 누군가의 잘못은 그저 개인의 문제로 여기면서 자신보다 약한 존재인 아이와 여성의 잘못은 전체의 문제로 확대하여 ‘맘충’이라는 말을 지어내고 ‘노키즈존’이라는 혐오의 공간을 만든다. 누군가는 그걸 권리라고 착각하겠지만, 어떤 존재를 혐오하고 배제할 권리란 세상에 없다. 권리는 내 것을 지키기 위해 상대의 것을 제한하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때로는 나의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타인의 권리를 지키는 데 애를 써야 나를 포함한 모두의 권리를 지킬 수 있다. 이렇게 혐오와 배제의 목록만 늘리는 사회에서는 어떻게 존중을 배울 수 있을까? 이런 사회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라는 요구는 너무 염치없지 않은가!

노키즈관을 요구한 관객들의 행태도 황당하지만, 그것의 찬반을 물은 언론사가 끼치는 해악은 더 크다. 혐오적 발상을 공적 의견으로 격상시키고, 인권을 찬반의 문제로 여기게 했기 때문이다. 인권은 찬반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존재 특히, 아이와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에게는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행하고, 누릴 권리가 있다.

그러니 정부를 비롯한 주류 영역에서는 마음 놓고 인권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도모한다. 동성애는 반대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며, 사회 구성원이라면 결혼할 자유와 하지 않을 자유를 법적으로 보장받아야 함에도 ‘사회적 합의’를 운운하며 물러선다. 이들 뒤에는 각종 ‘노XX’ 공간과 ‘~충’을 양산하는 이들이 있다. 아이들이 사라져야 영화를 제대로 볼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을 권리라 말하고, ‘맘충’이라는 단어를 거리낌 없이 만들어내는 사회에서는 모든 곳이 ‘노키즈존’일 수밖에 없고, 인권은 언제나 ‘나중’ 문제일 수밖에 없다. 이런 세상에서 다들 행복하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