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정략적 ‘필리버스터’로 국회 유린한 한국당, 규탄한다
자유한국당이 29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될 모든 안건에 대해 ‘필리버스터’를 전격 신청했다. 200여개의 안건 처리를 예정했던 본회의는 민주당이 불참하면서 의결정족수 부족으로 무산됐다. 한국당은 패스트트랙에 태워진 선거법(연동형 비례대표제)과 검찰개혁법안 저지가 필리버스터 목적임을 분명히 했다. 내달 3일 이후 일괄 상정이 예고된 패스트트랙 법안의 저지선을 일찌감치 본회의 민생 법안부터 치고 나선 격이다. 국회법은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이 요구하면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 행위인 필리버스터를 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회기가 종료되거나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이 찬성한 토론 종결 표결이 없으면 무제한 토론이 가능토록 한 것이다. 한국당은 의원 108명이 4시간씩 필리버스터를 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본회의 200여개 안건과 곧 상정될 패스트트랙 법안까지 합치면 안건당 1명만 나서도 필리버스터가 800시간이 넘는다. 내달 10일까지 260여시간 남아 있는 정기국회를 다 덮어버릴 작정을 한 셈이다. ‘예외’를 인정받는 것은 예산안뿐이다.
한국당의 필리버스터는 기습적이었다. 오전까지 나경원 원내대표는 이날 제출한 유치원 3법 수정안(김한표법)을 설명하고, 필리버스터는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국가·학부모로부터 받은 돈의 회계를 분리하고 시설사용료를 인정한 한국당 수정안은 사립유치원 연합체 한유총의 요구사항을 담고 있다. 수정안 표결을 시사했다가 3시간 만에 급선회한 것이다. 민주당에선 그사이 ‘김한표법 수용 거부 시 필리버스터를 하겠다’는 한국당 요구가 있었다고 했다. 국민 80%와 대다수 정당이 지지한 ‘유치원 3법’부터 필리버스터로 막으려 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본회의 모든 안건에 필리버스터를 건 정당은 전례도 없다. 1970년대 3선 개헌안이나 의원 체포동의안, 2016년 테러방지법만 무제한 토론이 벌어졌다. 한국당은 ‘소수당의 권한’을 앞세우고 ‘민식이법’ 등 일부 민생법안 표결처리 뜻을 밝혔다. 여론 악화를 겁낸 구색 갖추기로 보일 뿐이다. 현재 본회의엔 20대 국회 1호법안이면서도 여야 합의 후 4년간 방치해온 청년기본법, 일부 ‘데이터 3법’과 상임위를 거친 많은 민생·비쟁점 법안이 부의돼 있다. 모든 법안에 건 필리버스터는 정략적이고 국회를 유린했다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
법안처리율이 31%에 그친 20대 ‘동물국회’는 끝까지 서버릴 처지에 몰렸다. 의회 정치가 통째로 저당잡힌 격이다. 한국당은 협상 의지 없이 장외투쟁만 반복한 8개월을 자성하고, 내 뜻대로 안되면 모든 법안을 볼모로 잡겠다는 발상부터 접어야 한다. 정기국회에서 필리버스터로 처리되지 못한 법안은 12월 임시국회에서 바로 표결에 부쳐진다. 그러나 또 다른 필리버스터가 벌어지면 파국만 길어질 수 있다. 국회의 존재 이유를 다시 묻게 된 오늘, 여야는 협상의 출구부터 찾아야 한다. 극에 다다른 시민들의 원성이 들리지 않는가.